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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정기룡(鄭起龍) 1562 ~ 1622 조선 중기의 무신.

조선조 선조(宣祖) (1562~1622) 때의 무신으로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河東郡 金南面 仲坪里)에서 좌찬성(左贊成) 호(浩)의 아들로 출생 하셨으며 초명은 무수(茂壽)였으나 선조 19년 무과에 급제하고 왕의 사명(賜名)으로 기룡(起龍)이라 개명하였다.

무과 급제 후 관례에 따라 북변 수자리를 3년간 마치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신립(申立)의 막하에 들었다가 선조 24년 전력부위(展力副尉)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가 되었다. 선조 25년 4월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날 때 전봉별장(前鋒別將)으로 우방어사(右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출전하여 거창(居昌)에서 왜병(倭兵)을 물리치고 금산(金山) 싸움에서 적진을 깨뜨리고 잡혀간 방어사 조경을 구출하였다. 전란중 노모의 생사를 알길 없어 애태우던 중 7월에 노모를 지리산(智異山)에서 뵙고 익일에 곤양(昆陽)으로 가니 군수 이강악(李光岳)의 요청으로 수성장(守城將)이 되고 유격별장으로 공을 세워 상주가판관(尙州假判官)이 되었으며 상주성에 웅거한 왜장 "모리데로모드"(毛利輝元)를 섬멸하니 상주의 경내가 이로부터 평안을 되찾았다. 12월에 당교(唐橋)의 적을 무찌르고 생민을 규휼하고 둔전을 개척하여 솔선 권농하였다. 선조 26년 중훈대부군자감부정(中訓大夫軍資監副正)이 되었으며 8월에 상주가목사(尙州假牧使)가 되었으며 10월에 영호토적(嶺湖土賊)이 작당하여 약탈을 일삼으니 이를 토벌하고 11월에 목사겸 감사군(감사군) 대장이 되니 이는 공이 매양 백성을 규휼하였으므로 그 중 장정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죽기를 다한 백사람들을 당하기로 일컫게 된 것이다. 나라에서 공의 대첩의 공을 치하하여 선조 27년 8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겸 토포사(討捕使)를 삼았다.

선조 31년 6월에 왜적의 재침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왜적은 14만 대군으로 부산(釜山)에 상륙하자 체찰사 이원익(體察使李元翼)이 장재를 권율(權慄), 곽재우(郭再祐) 등에게 물으니 정기룡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므로 8월에 토왜대장(討倭大將)을 삼아 고령(高靈)에서 적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았다. 계속하여 성주(星州) 고령(高靈) 합천(陜川) 초계(草溪) 의령(宜寧) 등 제읍을 수복하여 9월에 절충장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1월에 경주성(慶州城)을 탈환하고 12월에는 왜의 맹장 가도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막하로 들어갔으나 도산(島山)이 함락하자 경리양호(經理楊鎬)가 먼저 도망치고 명군(明軍)이 무너지자 왜병이 공을 사중으로 포위 하였으나 이를 뚫고 금산(金山), 상주(尙州)의 적을 무찌르고 다시 명군과 함께 사근적(沙斤賊)을 협격하다가 명나라 부총병(副총兵) 이절(李 )이 전사하자 명나라 황제가 공에게 총병관(摠兵管)을 제수하니 대저 황제가 백장(百將)의 우두머리로 삼은 일은 고금을 통하여 처음 있는 일이다. 선조 31년 성주(星州) 본진으로 회군하여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의 적을 종횡으로 소탕하고 12월에 삼대추봉(三代追封)을 받고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이 되었으며 선조 34년 1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를 지내고 선조 38년(1605) 4월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 제5위(一等第五位)에 기록되고 9월에는 오위도총부(五位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고 선조 40년 9월 의흥위상호군(義興衛上護軍)겸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으며 광해군(光海君) 9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겸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를 배하였고 광해군 10월 11월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다시 삼대를 추봉받았으며 광해군 13년 2월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특진되었으니 마침 광해군 14년 2월 28일 통영(統營) 본영에서 졸하니 향년 61세이시다. 유명을 쫓아 상주의 사벌에 장하였다.

선조가 일찍이 공을 칭찬하여 기룡(起龍)이 아니면 영남(嶺南)이 없고 영남이 없으면 오늘의 종사(宗社)가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믿어 안심하였는데 공의 위대한 공적을 듣지 못하게 한 것이 150년 그간 다행히 송우암(宋尤庵) 이갈암(李葛庵) 양현의 찬양함을 얻어 영조(英祖) 계사(癸巳)에 비로소 충의(忠毅)의 시호(諡號)를 받고 상주에 충열사(忠列祠)를 세워 제사지냈으나 뒤에 혜철(毁撤) 당하였다가 광복후 정부가 다시 고지(故地)에 충의사(忠毅祠)를 세웠으며 한편 출생지 하동에서는 남방사람들이 1932년 임신(壬申)에 경충사(景忠祠)를 세웠다.


담당부서
행정과 아동청소년담당 (☎ 055-880-2319)
최종수정일 :
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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